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(문단 편집) === [[프랑스 혁명]] 전까지 === 프랑스 아라스 시에서 법률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. 6살에 사산으로 어머니를 잃고 8살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.[* 1777년 뮌헨에서 사망했다.] 11살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콜레주 루이르그랑 (Collège Louis-le-Grand)[* 루이 14세 때부터 부르봉 왕조의 후원을 받아오던 파리 최고의 명문학교다. 지금은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등학교인데 그랑제꼴 합격률이 프랑스 최고다.]에 진학했으나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, [[장자크 루소]]와 [[카토]], [[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]]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.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. 12년간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[* 같은 시기에 [[카미유 데물랭]]이나 루이 프레롱 등의 혁명기 유력 정치인들이 같은 콜레주에 다녔으나, 로베스피에르의 학창 시절은 거의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.]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던 지라 종종 찢어진 옷, 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. 때때로 옷이 없어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도 했다고. 하지만 성적은 우수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, [[루이 16세]]가 대학을 방문하자 17세의 로베스피에르는 성적 우수자의 자격으로 500명 학생을 대표해 축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. 문제는 그날 비가 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맞으며 연설을 해야 했고, 애초에 한 나라의 국왕 폐하께서 비 맞아가며 17살짜리 애가 떠드는 알아듣지도 못할 장문의 [[라틴어]] 연설을 듣고 싶을 리도 없었으니 건성으로 듣고 대답없이 돌아갔다고 한다.[* 로베스피에르가 이후 루이 16세를 처형하니 비 맞은 복수를 했다는 드립이 있다.][* 그런데 당시 루이 16세는 21세였다. 루이 16세는 어릴 때부터 숫자 [[21]]을 무서워해왔는데, 그 때문에 건성으로 듣다가 돌아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. 참고로 [[프랑스 혁명]] 전 루이 16세에게 자금난으로 인해 돈을 요구한 [[귀족]]의 수는 21명이었고, 그가 처형된 날도 21일이었다고 한다.] 대학을 졸업한 뒤 아라스시의 법률가가 되어 괜찮은 수입을 올리며 살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그들을 대변하는 등의 행위로 여러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다. 법률가 시절의 유명한 사건 중에는 [[피뢰침]]에 대해 [[신성모독]] 혐의로 철거 명령이 내려지자, 이를 변호해 피뢰침을 지킨 사건이 알려져 있다.[* 이때 반대측에서 증거로 [[장폴 마라]]의 연구 자료를 제출했다.] 또한 '''사형제 폐지''', 처벌 앞에서의 평민과 귀족의 평등, 유죄를 선고받은 자에 대한 재산 몰수 폐지, 서자들의 처우 개선 등의 [[개혁]]을 주장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